보이지 않는 위험:
밀폐된 죽음의 공간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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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 나온다”는 말이 있었다. 어느 집에는 보일러를 때는 지하실이 있었고 마을에는 옛 폐광산과, 방공호 노릇을 하는 굴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호기심을 갖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구렁이가 나온다고 경고했다. 메워지지 않은 폐광산에서는 알 수 없는 가스가 새어 나왔고, 지하 보일러실에선 이따금 이산화탄소가 누출되는 사고가 있었다. ‘질식 위험’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 ‘보이지 않는 위험’은 ‘구렁이’의 모습을 띠었다.


어둠 속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온다. 작업자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밀폐 공간 속으로 물을 뿌리고 길을 만든다. 쓸려가는 이물질 속에서는 더 심한 악취가 올라온다. ⓒ 이정헌

위험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산업 현장에서는 질식 위험이 도사리는 밀폐 공간 속으로 작업자가 직접 들어가야 한다. 평소라면 들어갈 일 없는 밀폐 공간에 들어가 이따금 청소하고 내부 설비를 점검한다. 산소가 부족하고 유해가스가 숨어 있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작업 공간은 유해 요소를 만나면 질식할 위험이 도사린 ‘밀폐 공간’이 된다. 그 속으로 무심코 들어간 작업자는 의식조차 못한 채 쓰러지고, 그를 구하려고 달려간 동료의 생명도 함께 스러진다.

2019년 9월, 경북의 한 사업장. 폐수를 퍼내는 수중 모터에 고장이 생겼다. 노동자는 지하 수조 안으로 들어간 뒤, 모터와 주변 이물질을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맨홀 입구는 사람 1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그 안으로 높이 3.6미터에 24제곱미터, 약 7평 남짓한 공간이 있었다. 오징어를 손질하면서 나온 폐수는 30센티미터 높이로 고여 있었다. 맨홀 구멍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었다. 21년 동안 내부는 환기되지 않았고, 청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 그 속으로 들어간 외국인 노동자 P 씨(52, 베트남)가 쓰러졌고, 그를 구하러 들어간 3명의 동료 외국인 노동자도 질식해 쓰러졌다. 황화수소 급성 중독이었다. 4명 모두 숨졌다.

“맨홀 아래로 얼굴이 내려간 뒤, 사람이 소식도 없고 의식도 없어요. 불과 5초 내지 10초 안에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찬석, 부산가톨릭대학교 산업보건학과 교수

질식을 불러오는 가스는 밀폐 공간 아래 숨어있다. 오∙폐수나 분뇨가 부패하면서 발생하는 황화수소는 공기보다 무거워 바닥에 가라앉는다. 퇴적물 속에 숨어있다가, 움직임이 생기면 높은 농도로 뿜어져 나와 밀폐 공간을 채운다. 급성 중독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유해가스이다. 일정 농도(150PPM)가 되면 작업자의 후각을 마비시켜 위험을 은폐한다. 이를 알지 못한 작업자는 질식해 쓰러지고, 구조하러 들어간 동료도 질식한다.

<단비뉴스> 기획탐사팀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발생한 질식 재해 193건 현황자료를 입수했다. 더불어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실의 도움을 받아, 고용노동부로부터 역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치 질식 사고에 관한 ‘재해조사의견서’ 123건을 확보했다. 산업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가 직접 작성해 고용노동부에 제출하는 ‘산업재해조사표’ 7년치도 함께 확보했다. 10년 동안 발생한 질식 재해를 건건이 분석해, 재해자의 죽음과 산업 현장을 들여다봤다.

<단비뉴스>는 재해자 332명이 질식한 밀폐 공간 193곳을 기록한다. 질식당한 재해자 332명이 몸담았던 산업 현장의 얘기이자, 그들이 직접 겪은 밀폐 상황이다.

원을 클릭하시면 질식 재해조사의견서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질식 재해를 당한 사람의 절반이 죽었다. 10년 동안 발생한 질식 재해는 193건이다. 전체 사상자는 332명으로, 171명이 죽고 161명이 다쳤다. 사망률 51.5%다. 밀폐 공간에서 질식한 작업자를 구조하려던 동료들도 질식해 죽거나 다쳤다. 재해조사의견서를 통해 재해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123건의 질식 재해를 보면, 복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재해는 59건이다. 이 가운데 44건은 밀폐 공간에 쓰러진 작업자를 구조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동료 노동자가, 업체 대표가, 임원이, 때로는 거래처 직원이 그렇게 죽거나 다쳤다.

질식 재해 현황 (2010-2019)
질식 재해를 일으키는 유해 요소

평균적으로 매해 질식 재해를 당하는 작업자는 25명 안팎이다. 2012년부터 3년간 질식 재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2013년에 재해자 수는 60명으로 가장 많았다. 질식재해를 가장 많이 일으킨 유해 요소는 황화수소로, 전체 193건 가운데 55건(28.5%)을 차지했다. 밀폐공간 안에서 산소결핍으로 인한 질식 재해는 46건이었고, 일산화탄소가 39건이었다. 불활성가스인 질소와 아르곤 가스에 질식한 재해가 34건으로 뒤를 이었다. 휘발성이 강하고 폭발하기 쉬운 유기용제는 10건의 질식 재해를 유발했고, 기타 독성가스는 6건, 이산화탄소 3건이었다.

“질식은 눈에 보이질 않아요. 소리없이 다가오는 거죠. 밀폐 공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육안으로는 보이질 않아요.”

정만갑,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노동안전보건실 부장


'6분', 산소결핍으로 질식해 호흡이 멎은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호흡이 멈춘 상태로 6분이 지나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 이정헌

발효 중인 효모는 숨을 쉬는 미생물이다. 저장탱크 안에서 호흡하며 산소를 조금씩, 계속 삼켰다. 저장탱크의 산소 결핍 상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공장장은 저장탱크 안의 내용물을 휘젓는 ‘교반기 날개’를 교체하려 했다. 저장탱크의 맨홀 뚜껑을 연 뒤, 줄을 타고 탱크 안으로 내려갔다. 1개월 경력의 일용∙임시직 직원이 뒤를 따랐다. 둘레 2.4미터에 높이 3.2미터인 탱크 안으로 발을 내디딘 그들은 마취되듯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직원은 쓰러지면서 생긴 등의 상처가 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비좁은 탱크 안에서는 119 구조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장장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2011년 10월의 마지막 날, 질식 재해로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산소농도가 4~6%인 밀폐 공간에서는, 단 한번의 호흡으로도 질식해 의식을 잃을 수 있다. 실제 밀폐 공간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내부를 살피기 위해 뚫린 구멍으로 고개를 넣는 경우가 있다. 입구 층의 산소농도가 6% 이하라면 순식간에 혼절할 수 있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죠. 제가 이 회사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 때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잊을 수가 없죠. 전부 다.” 노동자 신승희 씨

쇳물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항아리 모양의 전로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제철소 전로 안에서 열을 견뎌내는 ‘내화벽돌’을 교체하는 일이었다. 하루 12시간 2교대로 고되게 일했다. 열흘에 걸친 축조 작업을 마친 새벽, 전로 안의 작업대를 철거하는 일이 남았다. 교대한 동료들은 지체없이 전로 안으로 향했다. 전로 입구에서 3.2미터까지는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 불과 1미터 더 내려가자 동료 4명이 쓰러졌다. 감전으로 착각한 나머지 동료는 “전기 꺼”라고 외치고는 이내 쓰러졌다. 이날 노동자 5명이 질식해 숨졌다.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가스는 내화벽돌을 축조하는 공정과 무관한 일이었다.

하루 전 제철소의 다른 하청업체가 배관 누설 시험을 했고, 불량이 난 밸브에서 새어 나온 아르곤 가스가 화근이었다. 전로를 채운 무색무취의 아르곤 가스는 전로 안의 산소를 밖으로 밀어냈다. 아르곤 가스가 가득 찬 밀폐 공간에 산소는 없었다. 그 속으로 사람이 내려갔고, 질식했다. 재해조사의견서는 “전로 정비작업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관리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전로 안에서 내화벽돌을 쌓던 노동자들도, 배관 누설 시험을 한 다른 하청업체 노동자들도 서로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질식 위험 공간’은 자연 환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공간에 질식 요소가 더해지면서 생긴다. 지난 10년 동안 질식 재해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장소는 폐수와 하수 등을 저장하거나 처리하는 ‘오폐수처리장∙정화조(41건)’이다. 오∙폐수 안에 숨은 황화수소가 터져나오면서 질식 재해를 일으킨다. 작업자들은 저장탱크, 물탱크와 같은 ‘저장용기(33건)’ 안에서도 산소 결핍에 노출되거나 유해가스에 중독돼 질식한다. 지면 아래 밀폐된 공간을 이루고 있는 ‘맨홀(27건)’ 안에서도 질식해 쓰러지거나 추락한다.

겨울철 건설 현장(26건)에서는 콘크리트를 굳히기 위해 건물의 사방을 밀폐한 뒤 난로를 피운다. 작업자들은 이 때 발생한 일산화탄소에 질식한다. 배관을 용접하던 중, 용접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배관 내부(15건)’에 들어갔다 그 안을 채운 아르곤 가스에 질식하기도 한다. ‘기계설비(보일러 등)’ 안에서 12건, 선박 안 화물창이나 부력탱크 등에서 10건의 질식 재해가 있었다. 돼지 분뇨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축사 정화조에서도 10건이 발생했다.

위험을 알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단비뉴스> 기획탐사팀은 질식 위험이 있는 일부 밀폐 공간을 VR(가상 현실) 360도 사진 속에 담았다. 하수처리장과 양돈장의 밀폐 공간, 그리고 상∙하수도 현장이다.

화면을 마우스로 드래그해서 360도 사진을 확인하세요
하수처리장의 관문인 밀폐 공간이다. 시내에서 흘러들어오는 모든 하수가 이곳을 통한다. 6M 아래 설치된 수문을 열고 닫아, 하수처리장에 유입되는 하수량을 조절한다. 수문이 고장 나면 질식 위험이 있는 아래로 사람이 내려가야 한다. 하수 위에 떠 있는 이물질을 치우는 것도 작업자의 몫이다. 콘크리트 바닥에 깔린 이물질은 하수에서 생겨난 기름 덩어리이다.
하수처리장
유입접합정
침사제거기
2차 침전지
잉여슬러지 저류조
상수도
상수도 제수변실
하수도
일반 하수도 맨홀
하수도 중계펌프장
양돈장
퇴비사
분뇨처리시설
집수조

“동료가 옆에서 쓰러지면 다 정신을 잃어요. 동료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없이 들어가게 되고 질식 사고가 생기는 거죠. 그러기 전에 안전장비를 충분히 갖추고 들어가는 게 현명하다고 봐요”

황재구, 충주시 환경수자원본부 하수과 시설운영1팀 팀장

안전한 노동 환경은 함께 만드는 것이다. 사업주와 안전보건관리책임자 그리고 노동자 모두에게 질식 예방 수칙은 ‘생명줄’과 같다. 사업장 내 밀폐 공간은 사전에 파악돼, 모두가 평소부터 밀폐 작업에 대비해야 한다. 밀폐 공간을 환기하는 일은 작업 전에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고, 작업 중간에도 수시로 이루어져야 한다. 산소 농도와 유해가스를 측정해 밀폐 공간 내 보이지 않는 위험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이다. 황화수소가 측정되는 밀폐 공간에서는 퇴적물을 휘저어보는 등의 추가 측정도 거쳐야 한다. 밀폐 작업 팀은 최소 2인 1조를 이루어 외부에 감시인을 두고, 구조용 삼각대 등을 배치해 응급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공기호흡기와 송기마스크 등 호흡용 보호구는 보이지 않는 질식 위험으로부터 작업자를 지켜줄 수 있다. 모두 밀폐공간 작업을 위한 기본적인 안전수칙에 나오는 내용이다. 항상 그렇듯이, 기본을 지키지 않는 틈을, 위험 요소가 노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위험: 밀폐된 죽음의 공간에 가다

웹사이트 기획 및 글: 이정헌
취재: 단비뉴스 기획탐사팀 (이정헌, 이예슬, 김성진)
VR 촬영: 인디스팟
웹사이트 디자인 및 개발: 이정은, 카이 피사로위치 (Bold Exte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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